어떤 날은 밥을 제대로 먹었는데도 속이 막혀 있다.
기름진 걸 먹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체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속이 울컥하고 묵직하다.
그럴 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말을 삼켰더라?’
장은 이상하게 내 감정을 먼저 알아챈다.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하루,
말하지 못한 마음을 억지로 덮어버렸던 날이면,
속은 그걸 기억하고, 서서히 내 안에서 부풀기 시작한다.
내가 억누른 감정이, 장을 통해 조용히 항의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흔히 장 건강을 식이섬유나 유산균, 발효식품 같은 ‘영양 정보’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장은 ‘마음’을 먹는다.
그날의 감정 상태, 생각의 무게, 참았던 말투까지 다 기억하는 기관이다.
신기하게도 장에는 뇌 다음으로 많은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을 ‘제2의 뇌’라 부른다.
나는 그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장이 뇌처럼 생각하고, 반응하고, 기억하는 곳이라면
감정이 복잡한 날, 장이 먼저 아픈 것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유 없이 속이 불편한 날이 계속됐다.
병원을 가도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때 문득 이런 문장이 머리를 스쳤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주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장을 향해 손을 얹고 천천히 호흡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괜찮아, 오늘은 가볍게 시작하자”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식사할 땐 핸드폰을 멀리 뒀다.
조용히, 내가 먹는 음식과 내 속을 바라보는 시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식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 선택한 음식들을 천천히 씹으며
장의 속도를 따라가려 했다.
하루에 한 번은 나에게 물어봤다.
“속이 불편한 이유가 정말 음식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그 대부분은 감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잠들기 전 배 위에 따뜻한 찜질팩을 올렸다.
그 온기가 배 속 깊이 번지면서
하루 종일 쌓였던 감정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건 위로였다.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니라, 온도로 건네는 다정함.
장은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건 참 다정한 기관이다.
내가 애써 감추려 했던 것들을,
대신 말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장이 아프다는 건,
내가 나를 너무 오래 외면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프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
“지금 나, 속이 편안한가?”
그 질문 하나가, 오늘을 다르게 만든다.
장을 지키는 일은 마음을 보살피는 일과 같다.
나는 매일 한 번, 장과 대화를 한다.
“오늘은 어땠어?”
무언가 답이 오는 건 아니지만,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나는 이미 나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누군가는 친구와의 대화로 해소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내 몸속에서 말하고 있는 장을 듣는다.
장이 편안하지 않으면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즐겁지 않고,
장이 불편하면 대화도, 생각도, 모든 것이 어긋난다.
한동안은 감정을 눌러두는 게 미덕이라 생각했다.
어른이니까, 사회생활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바꿨다.
감정을 잘 느끼는 사람이 장 건강도 잘 지킨다.
왜냐하면 감정은 몸 어딘가에서 반드시 ‘형태’를 남기기 때문이다.
장의 상태는 말없이 말하는 내 감정의 발자국이다.
긴 하루를 지나 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누워 복부를 살짝 누르면
딱 알 수 있다.
‘오늘은 많이 애썼구나.’
그러면 그날은 더 따뜻하게 나를 감싸준다.
몸을, 마음을, 장을 동시에.
이 루틴이 나를 지킨다.
거창한 식이요법이 아니고, 비싼 영양제가 아니라
매일 10분의 다정함.
장을 어루만지는 손길 하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자가치유였다.
장은 그저 소화기관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걱정,
서운해서 삼켜버린 말들,
괜찮은 척하면서 눌러둔 감정이
고스란히 그곳에 남는다.
나는 요즘 그런 감정을 ‘쌓아두지 않는 삶’을 배우고 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터뜨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 한 번, 내 감정을 듣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한다.
장을 편안하게 해주려면 무엇보다 마음부터 풀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려준다.
조용한 저녁,
불을 끄고 앉아 복부를 살짝 쓰다듬는 순간,
장은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어땠어?’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이,
나는 천천히 내 안의 파동을 정리한다.
장은 그저 음식만 소화하는 곳이 아니다.
장은 감정도 소화한다.
그리고 감정을 잘 소화하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 나의 하루는,
장을 통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무너졌던 리듬이 되살아나고,
잠들지 못했던 밤들이 차분해지고,
무기력했던 마음에도 빛이 스며들고 있다.
장은 늘 내 편이었다.
내가 외면할 때조차,
말하지 못했을 때조차
묵묵히 내 마음을 대신 끌어안던 존재.
이제는 내가 그 장을 돌볼 차례다.
음식보다, 약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이 시선 하나.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은 흘러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언제나 내 안의 ‘장’에서부터 시작된다.